노루똥과 김명섭....
글. 손복희
내가 잘 알고 지내는 지인들 중에 존경하는 명섭씨가 있다.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나다니앨 호손의 단편소설 "큰바위 얼굴"을 연상하게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일체의 것을 다 사랑할 수 있는 분이 아닌가 싶다.
가끔 사는 일에, 한없이 지치고 힘겨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의 명섭씨는 내가 하는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나직나직하게 또는 강한 어조로 내게 말해 준다. 듣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내가 왜 그 일을 가지고 그렇게 심각한 고통을 느꼈었는지 스스로 이상하게 생각 될 정도로 너무나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그 분을 소개할 때는, 언제나
"저의 선생님이십니다."라고 말한다. 다정하고 온화하고 관대하고 친절해서 누구에게나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주는 좋은 분이다. 하늘과 구름, 새들과 대화하고 꽃나무와도 대화한다. 바위에 붙어 있는 무당벌레를 살짝 떼어내며 "누가 밟으면 안 되니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저 쪽에 가 있어!"라고 한다거나 "바위야 나는 니를 사랑한데이!"라며 두 팔을 활짝 펴서 힘껏 껴안는 것을 볼 수 있다.
겨울도 다 지나 봄기운이 완연했던 어느 날, 명섭씨로부터 수정산(구봉산) 댓잎을 보러 가자는 전화가 왔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있어, 이런 기회는 몸을 풀어 주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운동이 되는 날이다.
자갈치 농협공판장 식품부를 담당하는 마음씨 좋은 숙자씨에게서 얻어 온다면서, 노루에게 줄 야채가 든 큰 가방 두개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노루 먹이인 줄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전에도 가끔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 철에는 노루 먹이가 없어서인지 노루들이 바짝 말라 있더라는 것이다.
아직도 잔설이 덮여있는 산을 올라가면서 보니 띄엄띄엄 야채들을 놓아 둔 흔적이 있었다. 엄마가 자식을 애지중지 키우 듯, 명섭씨는 노루의 엄마였다. 올 겨울 내내 그렇게 보살펴 왔던 것이다. 나뭇가지로 흩어진 야채들을 다시 모아 놓고, 새로 가지고 온 푸르고 싱싱한 야채들을 그 위에 더 얹어 놓았다. 그 옆으로 뭔가를 자세히 살피니 반짝반짝거리는 작고 까만 콩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어쩜 그렇게 윤기가 나는지. 그날은 우리가 올라가기 며칠전에, 큰 눈이 와서 땅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에 노루똥도 젖어 있었다.
잠시 넓적한 바위에 앉아 쉬면서 명섭씨가 들려준 노루똥 이야기가 있다.
중앙동에 가면 다래헌이라는 아주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찻집이 있다. 나도 잘 알고 지내는 다래헌 주인 선생님과 명섭씨의 지인인 스님, 명섭씨 이렇게 세 사람이 앉아 차를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명섭씨가 주머니에서 노루똥을 한 웅큼씩 꺼내 스님에게 한 주먹, 다래헌 선생님께 한 주먹씩 나누어 주면서 "이게 무엇이겠습니까?" 했더니, 스님이 냄새를 맡아 보기도 전에 "이게 뭐지? 보약인가? 명섭씨는 안 좋은 것은 들고 다니지 않지." 하면서 입에 그대로 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던 다래헌 선생님도 따라서 입에 한 주먹을 그대로 꿀꺽 넘기셨던 것이다. 그것이 뭣인지 설명할 틈도, 말릴 틈도 없이 짧은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가 "아이고! 저를 어째!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햇더니, "어쩌기는 어쩝니까? 나도 한 웅큼 입에 털어 넣었지요. 하하!" 그러고 나서 스님과 선생님 앞에서 사실은 조금 전에 드신 것은 노루똥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다. 스님은 허허...하고 웃으시고, 다래헌 선생님은 얼굴이 사색이 되셨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천진스럽게 웃으며 들려주는 것이었다.
아마 그날 수정산, 온 산이 흔들렸을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음이 터져 산을 오르면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르는 유쾌한 이야기였다. 모르고 먹으면 약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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