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편안함 하나.
어제는 비가 내렸다.
이런 날이면 몸을 쓰는 일보다는 사람을 만나거나 사무적인 일을 하기에 알맞다.
이 것 저 것 할 일을 적어 하동읍내로 향했다.
증명사진 찍기, 등기우편 보내기, 입금하기, 철물점에서 무엇 무엇 사기,
하동 군청에 들러 민원보기 등등....
오랜만에 친한 사람도 만나서 점심도 같이 먹고 마지막에 들른 곳이 하동 군청이다.
마을 하수도 공사 관련한 문의가 있어 담당자를 만나러 온 것이다.
군청 본관에 들어서서 관련문의를 하려는데 아랫배가 사르르 아파 온다.
아무래도 큰 걸 봐야겠기에 화장실로 향했다. 요즘 우리나라 관공서가 어디나 그렇듯이
군청화장실의 시설은 A급이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좌변기가 "비데"다.
"비데".....
비데가 있는 좌변기는 왠지 부담스럽다.
평소 사용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부담, 이런 저런 상상, 우려가 언뜻 들었지만
일을 보기로 했다.
좌면기에 걸터 앉자 마자 색다른 경험이 시작되었다.
겨울에 집에서 좌변기에 앉으면서 통과해야하는 맨살의 엉덩이에 와닿는 차가운 느낌이
참 싫기도 하고 또 익숙해진 통과의례인데 군청화장실 비데는 그렇지 않았다.
엉덩이에 와 닿는 따뜻하게 데워진 좌변기의 온기, 그리고 이어서 불어오는 따듯한 바람.....
아하,,비데가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사람들이 비데를 설치하는 이유도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일을 마져 보고 이제 뒷처리를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비데 오른 쪽에 많은 버튼 들이 있었지만
기계 다루는데에 익숙한 나는 당황하지 않고 차근 차근 읽어 보았다.
정지,세정,비데, 건조....건조? 무슨 식기제척기도 아니고 건조까지 한단 말인가...
비데는 뭐고 세정은 뭐지? 고민하가다 비데 버튼을 눌렀다. 당연히 물이 뿜어져 나오리라는건 알지만 똥꼬에 신경이 곤두섰다. 이윽고 기계음과 함께 센물살이 뿜어져 나와 살에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깜작 놀라고 말았다.."앗뜨거" 뜨거운 물이 아닌가.
사실 뜨겁다기 보다는 따뜻한 물이었지만
예민한 똥꼬가 경험해보지 못한 따뜻한 물살에 놀랐던 것이다.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적응을 하니 물의 온기가 괄약근을 지나 직장를 거쳐 대장까지 느껴진다.
건조버튼을 눌러 말기기까지 하고 나니 뽀송뽀송한 똥꼬의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져 화장실 문을 나설땐 목욕탕을 나설 때의 개운함이 느껴졌다.
대변(大便), 말 그대로 크다란 편안함을 누린 경험이었다.
앞으로 하동읍내에 오는 길엔 꼭 군청화장실에 들러야겠다.
큰 편안함 둘.
아침에 눈을 떠니 어제온 비로 창너머 앞산에 운무가 자욱하고 봄기운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촉촉한 아침이다. 산책하기엔 아주 좋은 날씨라 오랜만에 산책을 나섰다.
느릿한 걸음으로 마을을 빠져나와 개울을 지나서
마을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앞산에 다다르니
겨우내 푸르럼을 잃지 않은 녹차밭에 안긴 작고 아담한 우리 마을정경이 아름답기만 하다.
잠시 마을풍경을 감상하다 다시 오르막길을 향했다.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앞산 고개에 올라 화개계곡을 한눈에 내려다 보고 올 참이었다.
하지만 오르막 길을 몇걸음 오르기도 전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침마다 매일 변을 보는 습관때문인지 아랫배가 살살 아파온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집이지만 거리로는 제법되는 거리라 발걸음을 빨리 옮겨야만 했다.
초목이 우거진 여름이면 숲에 들어가서 일을 보겠지만 겨울이라 산에서 일을 봤다간
건너편 동네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다.
발걸음을 빨리해서 걸을 수록 아랫배의 통증은 깊어만 갔다. 개울 근처에 다다르랐을 즈음엔
뭔가 결정을 해야했다. 마을을 통과해서 집까지의 거리로 미루어 볼 때 굉장한 어려움이 따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랫배의 압박감이 점점 더 심해져, 결국 나의 발길은 이미 계곡옆 축대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마을에서도 보이지 않고 축대가 높아 고로쇠 물을 받으로 오르내리는 차가 지나가고
보이지 않는 위치라 노상배변하기엔 적합한 자리였다.
급하게 자리를 잡아 앉아 바지를 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
느긋하게 괄약근의 긴장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니
뒷쪽엔 높은 축대가 나를 숨겨주고 있어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고
앞으로는 탁트인 시야에 파릇한 녹차밭이 운무에 젖어 병풍마냥 펼쳐져 있었다.
대변을 보는지도 잊은 채 겨울 소나무와 차나무의 푸르름에 젖어
흡사 물아일체의 세계에 빠져 든 느낌에 사로잡힌다.
다시 말해 산과 내가 하나가 되고 똥과 산이 깨끗함과 더러움의 경계도 없이
하나로 연결된 채 아침 볼일을 보는 것이다.
'어제는 군청 비데로 똥꼬가 호강을 하더니 오늘은 이렇게 선경속에서 호강을 하는구나'라고 느끼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든다
.
가만! 이제 나의 똥꼬는 뭘로 딱지? 주변을 둘러보니 겨울이라 마른 낙엽만 뒹굴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비에 젖어 도저히 사용이 불가능 하다.
어제 군청 비데는 씻겨주고 말려주더니...이게 뭔 일인가 ...
난감한 가운데 윗도리 주머니를 손을 넣어보니 뭔가가 잡힌다.
꺼내보니 반갑게도 "종이"다.
어제 농협에 들고 갔던 돈봉투, 그리고 무통장 입금표....
그래,이거면 될 것도 같다. 우선 종이 봉투을 펼쳐보았다, 펼치고 보니 제법 넓은 면적이 나온다.
종이를 여러번 구겨서 부드럽게 만들고 나니 무난히 뒷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가볍다.
이렇게 좋은 전망앞에서 똥누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맘이 날아 갈 것 같이 가볍고 편안하다.
큰 편안함이다.
다음엔 산책을 나갈 땐 화장실에 들렀다 나가야겠다.
혹시 모르니까 휴지도 챙겨서..
